우리 아파트에서 화재경보가 울린 건 지난달 새벽 3시 40분이었다.
나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정확히 말하면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몸이 먼저 일어났다.
높고 날카롭고 일정한 간격으로 끊기는 소리.
그 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안다. 그건 다른 어떤 소리와도 닮지 않았다.
보보가 옆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이야?"
"모르겠어."
그다음 4분 동안 우리가 한 일을 나는 아직도 순서대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4분이 이 글의 전부다.
이것은 결국 오작동으로 끝난 새벽의 기록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나는 그 4분 동안 내가 얼마나 아무 계획도 없는 사람인지를 알았다.
4분
첫 번째로 한 일은 문에 손을 대 보는 것이었다.
어릴 때 배운 것이다. 문이 뜨거우면 열지 말라고.
문은 차가웠다.
두 번째는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탄내가 나는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지 않는다고 안전한 건 아니다.
18층짜리 건물의 9층에 살면서 6층이 타고 있어도 우리 집 문틈까지 냄새가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세 번째는 탱고였다.
탱고는 이미 깨어 있었고 현관 쪽을 향해 서 있었다.
짖지는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나는 그 자세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탱고는 안내견이지 소방견이 아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게 드러났다.
복도에는 이미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누군가 통화하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그 소리들이 한꺼번에 겹치자 내가 평소에 쓰던 방법이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 복도를 소리로 읽는다.
벽에 반사되는 발소리로 폭을 알고 어느 지점에서 소리가 트이는지로 계단 입구를 안다.
그런데 사람이 스무 명쯤 동시에 움직이면 그 지형이 무너진다.
반사음이 사람 몸에 흡수되고 목소리가 벽을 덮는다.
익숙한 복도가 처음 와 보는 곳이 됐다.
보보가 내 팔을 잡았다.
"계단 이쪽."
탱고가 앞장섰고 우리는 내려갔다.
계단은 괜찮았다.
난간이 있고 층마다 참이 있고 발밑의 감각이 규칙적이다.
사실 계단은 시각장애인에게 그렇게 어려운 구조가 아니다.
어려운 건 계단까지 가는 길이고 더 어려운 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내려가면서 한 가지가 계속 걸렸다.
지금 불이 어디서 났는지를 나는 모른다는 것.
보보에게 물었다.
"위야 아래야?"
"모르겠어. 연기 안 보여."
그때 알았다.
보보도 모른다.
경보음은 불이 났다는 사실만 알려 줄 뿐 어디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시각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보의 문제였다.
18층 건물의 9층에서 위가 타는 것과 아래가 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아래가 타면 내려가는 게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주민에게 주는 장치가 이 건물에는 없었다.
경보기는 울리기만 하고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9층에서 출발해 5층쯤 내려왔을 때 방송을 들었다.
관리사무소 스피커였다.
"오작동입니다. 오작동이니 세대 내로 복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누군가 아이고 참 하고 말했다. 몇 명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도 올라왔다.
보보는 다시 잠들었고 나는 못 잤다.
물어보러 갔다
다음 날 아침 관리사무소에 갔다.
"어제 그거 왜 그런 거예요?"
"감지기가 노후돼서요. 습해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관리소장은 미안해했다.
나는 진짜 묻고 싶은 걸 물었다.
"혹시 이 아파트에 대피가 어려운 세대 명단 같은 게 있나요?"
"명단이요?"
"저 같은 사람이요. 아니면 휠체어 쓰시는 분이나 거동 불편하신 어르신이요."
잠깐 조용했다.
"그런 건 따로 없습니다. 관리비 고지서 나가는 세대 명부는 있는데 그건 다른 거고요."
"불이 나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어... 방송 나가면 계단으로 대피하시면 됩니다."
"제가 못 나오면요?"
"그러면 119에 신고를 하셔야죠."
이건 관리소장이 무능해서 나온 답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아는 대로 정확하게 답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파트에서 화재 대응 절차는 딱 저 두 줄이다.
방송을 듣는다. 계단으로 내려간다.
그 두 줄은 전제를 깔고 있다.
방송을 들을 수 있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문을 열 수 있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갈 수 있는 몸.
그 전제에서 벗어나는 사람에게 남는 절차는 하나뿐이다.
119에 신고하고 기다리기.
기다리기가 절차인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나오는 길에 하나 더 물었다.
"이 아파트에 시각장애인이 저 말고 또 있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고 물어볼 이유도 없었으니까.
관리사무소는 관리비를 걷고 시설을 고치는 곳이지 사람을 파악하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그러면 누가 파악하는가.
동주민센터는 복지 대상자를 알고 소방서는 건물 도면을 안다.
활동지원기관은 이용자의 집을 안다.
그 정보들은 각각 다른 캐비닛에 들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정보학에서는 이걸 사일로라고 부른다.
각자 자기 곳간에만 쌓아 두는 구조.
평소에는 별문제가 없다.
문제는 4분 안에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곳간들이 하나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히지 않은 이름
8월 11일 오후 4시 55분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아파트 15층에서 불이 났다.
그 집에 살던 61세 여성과 38세 아들이 숨졌다.
어머니는 뇌병변 장애가 있었고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돌봐 왔다고 한다.
두 사람은 1층 화단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추락으로 추정된다고 보도됐다.
주민 40명은 스스로 대피했다.
스스로라는 말이 그 문장에 들어 있다.
이 아파트는 1992년에 지어진 영구임대아파트였고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설치 의무가 강화되기 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함께 살던 아버지는 휠체어를 쓰는데 그날 마침 외출 중이었다.
화재 원인과 추락 경위는 아직 조사 중이다.
그러니 무엇이 어떻게 됐는지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조사를 기다리는 일과 질문을 미루는 일은 다르다.
내가 그 기사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우리 관리소장의 답이었다.
그런 건 따로 없습니다.
그 집의 이름도 어딘가에 적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
15층에 거동이 어려운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소방이 도착하기 전에 알고 있는 체계는
지금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파트에 없다.
숫자
재난은 공평하게 온다는 말이 있다.
불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비는 모두에게 똑같이 내린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전혀 맞지 않는다.
2023년 장애인 실태조사를 보면 장애인구 중 65세 이상이 54.3퍼센트다.
장애인 가구의 1인 가구 비율은 26.6퍼센트다.
기초생활수급자 비율은 20.8퍼센트로 전체 인구의 4.8퍼센트보다 4배 이상 높다.
19세 이상 장애인의 84.8퍼센트가 만성질환을 갖고 있다.
일상생활에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한 사람 중 주된 지원자가 가족인 경우가 82.1퍼센트다.
공적 돌봄서비스 제공자가 주된 지원자인 경우는 13.8퍼센트다.
이 숫자들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구조가 보인다.
장애와 고령과 빈곤과 만성질환과 독거와 가족돌봄 의존이 같은 집에 모여 산다.
그리고 그 집은 대체로 오래된 건물의 위층이거나 지하다.
재난불평등은 재난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평소에 이미 아슬아슬하던 것이 위기에 가장 먼저 끊어지는 것뿐이다.
미국화재예방협회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 주택화재 사망자 가운데
신체장애가 사망에 영향을 준 경우를 연평균 460명 정도로 추정했다.
전체의 18퍼센트다.
그중 42퍼센트는 탈출하는 과정에서 31퍼센트는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
폭염 쪽 연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 7개 대도시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서
폭염 시 장애인의 온열질환 상대위험도는 5.075로 비장애인의 3.296보다 높았다.
더 눈에 띄는 건 65세 미만 장애인의 수치가 5.305로 비장애 노인의 4.287보다 높았다는 점이다.
폭염 대책을 고령자 중심으로만 짜면 젊은 장애인은 통째로 사각지대에 남는다는 뜻이다.
2022년 서울 신림동에서는 반지하에 살던 발달장애인 여성과 가족이 폭우에 고립되어 숨졌다.
2024년 인천에서는 아파트 화재 때 집에 있던 14세 지적장애 청소년이 대피하지 못하고 숨졌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불운이 아니다.
가족 한 사람이 잠깐 자리를 비운 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는 구조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앞서 활동지원사 김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공적 돌봄이 부족한 자리를 가족이 메운다는 것.
그 구조가 평소에는 미담으로 불리고 위기에는 사망 원인이 된다는 것.
돌봄의 82.1퍼센트를 가족이 감당하는 사회에서
재난 대응 계획이 없다는 말은
재난 대응 계획을 가족 한 명에게 통째로 위탁했다는 말과 같다.
그 한 명이 병원에 가거나 장을 보러 나가면 계획은 그 시간 동안 존재하지 않는다.
제도는 그 공백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그냥 뒀다.
가족이 알아서 하겠지.
그 문장은 평소에는 방임이고 화재가 나면 판결문이 된다.
명부라는 것
다른 나라들은 이 문제를 명부에서 시작했다.
일본은 2013년에 재해대책기본법을 고쳐서
스스로 대피하기 어려운 사람의 명부를 만드는 걸 지자체 의무로 정했다.
2021년에는 개인별 피난계획 작성을 노력 의무로 추가했다.
계획에는 어디로 어떻게 대피할지 누가 도울지 어떻게 연락할지가 들어간다.
호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갔다.
개인중심 재난대비라는 체계인데 장애 유형이나 등급이 아니라
의사소통 건강관리 보조기기 개인지원 보조동물 교통 주거환경 같은
실제 기능과 지원 필요를 중심으로 계획을 짠다.
그리고 그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 장애 당사자가 전문가 패널의 40퍼센트로 참여했다.
이게 중요하다.
장애인을 위한 계획이 아니라 장애인과 함께 만든 계획.
물론 이 제도들도 완전하지 않다.
일본의 개인별 계획은 노력 의무라서 지역마다 편차가 크다.
호주의 도구도 예산과 인력이 없으면 문서로만 남는다.
무엇보다 개인별 계획이 공공의 구조 책임을 개인과 가족에게 떠넘기는 알리바이가 되면 안 된다.
계획은 체계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체계에 연결되는 것이어야 한다.
15층에 누가 사는지를 적어 두는 일은
그 사람이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뜻이 아니라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 어디부터 올라가야 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UNDRR이 132개국 6342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6퍼센트가 지역 재난위험경감 의사결정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지역계획이 장애인의 구체적 필요를 반영한다고 답한 비율은 8퍼센트였다.
그런데 57퍼센트는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날 이후
우리 집은 그 새벽 이후로 몇 가지가 바뀌었다.
현관 신발장 위에 손전등과 물수건과 호루라기를 담은 가방을 하나 뒀다.
손전등은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보보에게는 필요하다.
호루라기는 나에게 필요하다. 목소리보다 멀리 간다.
탱고 하네스는 이제 침실 문 옆에 건다.
예전에는 거실에 뒀는데 새벽에 그걸 찾으러 거실까지 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계단은 몇 번 걸어 봤다.
평소에 엘리베이터만 타니까 9층에서 1층까지 계단이 몇 번 꺾이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안다. 참이 몇 개인지도 안다.
그리고 걸어 보면서 알게 된 게 하나 더 있다.
9층은 내려갈 수 있는 층이다.
숨이 차긴 해도 몇 분이면 1층에 닿는다.
우리 동에는 18층까지 있다.
15층이나 17층에서 이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같은 건물 안에서도 층에 따라 재난은 다른 얼굴을 한다.
그리고 오래된 임대아파트에서 이동이 어려운 세대가 어느 층에 배정되는지를 정하는 기준에
대피 시간이 들어가 있는 경우를 나는 아직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런 걸 준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런 준비의 대부분은 사실 개인이 감당할 일이 아니다.
내가 계단 참을 세는 것으로는 스프링클러가 생기지 않는다.
호루라기를 산다고 우리 동에 수평 피난구역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개인의 대비는 언제나 마지막 한 겹이어야지 첫 번째 겹이 되면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의 재난 대비는 거의 전부 그 마지막 한 겹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제목: 경보의 아키텍처 혹은 스스로 대피하라는 말에 대하여.
우리는 자꾸 이렇게 묻는다.
왜 그 사람은 대피하지 못했는가.
질문이 틀렸다.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왜 우리의 재난대응체계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대피할 수 있다고 가정했는가.
경보는 소리로만 울리고 안내는 방송으로만 나가고 피난로는 계단뿐이다.
이 설계는 어떤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는지 한 번도 밝히지 않은 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명령을 내린다. 즉시 대피하라.
그 명령이 명령으로 작동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경보를 인지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문을 열고 이동하고 계단을 내려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기까지
그 사슬의 어느 고리도 끊기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첫 번째 고리부터 끊긴다.
재난에서 독립이란 혼자 힘으로 탈출하는 게 아니다.
필요한 지원을 미리 예측하고 요청하고 제때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 상태다.
그 조건이 없는 채로 스스로를 요구하는 건 대비가 아니라 방치다.
결론: 재난은 우연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더 쉽게 죽고 누가 더 늦게 구조되는지는 우연이 아니다.
그건 설계다.
장애인의 생존이 가족의 헌신이나 이웃의 선의나 그날의 운에 달려 있는 사회는
안전한 사회가 아니라 아직 사고가 나지 않은 사회일 뿐이다.
그나저나 그날 새벽 이후로 탱고는 경보음이 조금이라도 비슷한 소리가 나면 현관을 본다.
전자레인지가 다 됐다고 울릴 때도 그런다.
보보는 그걸 보고 우리 집 화재감지기는 네 발 달렸다고 했다.
농담이지만 나는 그게 농담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 한 마리의 습관보다 나은 체계가 이 건물에 아직 없다는 뜻이니까.
언젠가 관리사무소 캐비닛 어딘가에 우리 집 호수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들어가면 좋겠다.
그때는 탱고도 마음 놓고 자기 밥그릇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