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gyunlim shared this post · 18h ago
홍수정

<호프>를 옹호하는 이유 - 해설 1부

  • 스포일러 주의. 인용 대사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호프>의 표면은 단순하다. 나홍진도 인정하는 바다. 마을을 떠도는 외계인, 그들을 쫓는 주민. 그게 다다. 액션으로 질주하며 두 관점을 오가는 정도. 많은 혹평은 여기 기인한다. 소위 말해 "뭐가 없다"라는 것.

하지만 표면을 한 꺼풀 들추면 그 아래 좀 다른 것이 보인다. 지층을 움직이는 마그마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흐르며 표면을 만드는 것.

겉보기에 <호프>의 주제는 '외계인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다른 걸 물을 것이다. 외계인은 왜, 그때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달리 말해, 무엇이 외계인을 만들어 내는가. 좀 더 불편하고 위험한 질문이다.

미리 말해두겠다. <호프>는 외계인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내용이 맞다.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다. 누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모든 이야기에는 화자의 욕망이 숨어 있다. 우린 거기에 집중해 영화를 다시 볼 것이다.

  1. 삼인성호(세 사람의 말이 호랑이를 만든다)

오프닝 시퀀스. 죽은 소 사체 앞에서 성기(조인성) 일당이 말한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몇 년에 한 번씩 온대요. 해솔이 아저씨가 그랬으면 진짜예요."

거짓말이다. 하지만 잠깐 동안 범석과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없던 호랑이는 그렇게 생겨난다.

어떻게 가능한가? 반복되는 말("진짜예요"). 그리고 '해솔이 아저씨'라는 이름.

'삼인성호'를 떠올리게 하는 시퀀스다. 여기서 호랑이는 "우리와 다른 종"이자 비극의 원흉이다. 무엇과 닮았나? 외계인. 하지만 호랑이는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범석의 노력은 소동으로 끝난다.

이 오프닝에서 기억할 것.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 내는 주민. 그걸 믿고 소동을 벌이는 무지한 인간.

한 가지 더. 이 동네 사람 말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성기 일당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보라(신고가 안 되는 총인데 신고했다고 한다)

  1. 정육점의 비극, 고범석의 본질

다리 밑에서 "나 사람이야 쏘지 마!"라고 외치는 낙연(이상희)은 진실의 입이다. 그는 범석에게 "왜 사람한테 총을 쏘고 X랄"이냐고 따진다. 이 대사는 범석이 '사람에게 총 쏘는 인물'이라는 걸 각인시킨다. 모든 사건의 발단.

곧이어 둘은 정육점 안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해 총을 갈긴다. 정작 쓰러지는 건 마을 청년 경석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또렷한 사건. 사실대로 신고하면 되냐는 낙연에게 범석은 화를 버럭 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고범석은 '사람을 해치고 진실을 가리는 인물'이다.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그의 본질이다. 우린 이걸 기억하며 영화를 해석할 것이다.

  1. <호프>는 범석의 이야기다

정육점 사건이 뇌리에 남지 않는 이유가 있다. 프레임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든 건 외계인 때문이고, 범석은 좋은 사람이라는 프레임. 그래서 출장소장이 주민을 쏜 사건은 사소하게 흘러간다.

이런 시선이 작동하는 건 <호프>가 범석 입장에서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화자이자 시선의 주인이다. 시점은 가끔 이동하지만 잠깐의 변화일 뿐이다.

한 마디로 <호프>는 범석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고.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는 화자의 욕망이 깃든다. 유리한 걸 키우고 불리한 걸 숨기는 건 자연스럽다. 당신은 이걸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1. 서로에게 총질하는 주민들

트럭 탄 청년들은 "네 뒤에 외계인이 있다"며 범석 쪽으로 총을 쏜다. 그런데 우린 앞서 정육점의 비극을 보았다. 외계인이 있다는 판단은 틀릴 수 있다. 그러니 이 말은 믿지 말자.

그렇다면 남은 팩트는 하나. 주민들은 범석 쪽으로 총을 쏘았다. 범석도 경석에게 총을 쏘았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지금 서로를 향해 총질하고 있다.

  1. 합리적이고 끔찍한 의심

전쟁의 긴장감이 감도는 마을(80년대 DMZ, 반공 포스터).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된 사람들(총 든 노인들). 서로에게 난사하는 주민들. 길에 즐비한 시체. 호랑이는 애초에 없었고 괴물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합리적인 의심을 낳는다. 혹시 이 비극은 주민들 스스로 만든 게 아닐까. 보이지 않는 적에 홀려 서로에게 총질한 건 아닐까. 전부는 아니겠지. 그런데 조금이라도 우리 탓인 건 아닐까.

하지만 이건 너무 끔찍한 상상이다. 우리가 서로를 해쳤다니. 곡성에서 남편이 아내를, 아이가 가족을 해쳤다는 소문처럼 말이다.

  1. 외계인의 적시타

바로 이 타이밍에 외계인이 등장한다. 비극의 원인을 몰라 불안할 때. 끔찍한 의심을 견디기 어려울 때.

그리고 외계인은 난동을 부린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민들이 서로를 죽인 게 아니었어. 그렇다면 범인은? 저 X같이 생긴(영화에 나오는 표현) 외계인이지. 딱 보면 모르냐.

이때 바미기르는 숨겨진 불안을 제거하는 '해결사'로 등장한다. 표면적으로 그는 난폭해서 문제다. 하지만 그 난폭함은 마을을 감도는 의심을 요긴하게 지워준다. 그는 정확한 시점에 나타나 악역을 떠안는다.

이토록 절묘한 타이밍. 꼭 필요한 악당. 우연일까?

  1. 관점이 만들어낸 괴물

범석이 정육점에서 사람을 해친 후, 그는 죄책감과 조급함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떳떳하지 못할수록 희생양이 간절하니까.

그리고 이곳 주민들은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낸 전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욕망이 '외계인'을 탄생시킨 건 아닐까? 없는 존재를 만들어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낯선 존재를 '외계인'으로 인지하고 비극의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것은 가능하다.

나홍진은 <호프>에서 perspective(관점)가 중요하다고 했다. 범석의 눈에 비친 외계인과, 외계인 눈에 비친 외계인은 확연히 다르다. 전자는 야만적이지만 후자는 인격적 존재다. 바미기르가 X같이 생겼다며 사냥하던 범석은, 그의 눈물을 보고 생각이 바뀐다.

관점에 따라 현실은 달리 인식된다. 관점은 현실을 만든다. 그렇다면 처음 등장한 살인마 바미기르 역시 범석의 눈이 만들어낸 환상은 아닐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이 가정을 밀고 가보자.

  1. 어구 가게의 덫

바미기르가 등장한 곳은 '어구 가게'다. 간판에 "어구, 통발, 덫"이라고 쓰여 있다. 무언가 낚는 도구들. 이곳에서 낚이는 건 누굴까.

곧 바미기르가 나타나며 영화의 장르는 괴수물로 전환한다. 이어지는 정신없는 액션. 이것이 바로 나홍진의 미끼다. 외계인에게 책임을 넘기는 순간, 그는 장르를 비틀고 액션을 펼치며 관객이 생각하지 않고 따라가도록 만든다.

그래서 수상한 단서들을 보고도,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내고 같은 주민끼리 총질하는 그들을 보고도, 우리는 범석의 관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아, 진짜 괴물이 있구나. 모두 저놈 탓이구나. 생각을 중단하는 순간 덫에 걸리는 건 바로 우리다.

이 장면은 탁월하다. 마을을 덮친 재앙. 은밀한 죄책감. 범인을 찾고 싶은 욕망.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 이런 것들이 한 번에 폭발하며, 괴물 추격이 시작된다. 그 짜릿한 쾌감 뒤로 '외지인을 범인으로 모는 비윤리적 판단'은 슬그머니 영화에 뿌리내린다.

  1. 마지막 트릭, 성애의 등장

나홍진은 하나의 트릭을 더 쓴다. 바로 성애의 등장이다.

성애는 단순하고 잘 휩쓸린다. 그녀의 말은("대체 몇 명을 죽인 거냐", "아무리 괴물이라도 이러면 안 된다") 바미기르가 범인이라는 선입견을 은밀히 주입한다. 그리고 응징을 좋아해서("용서는 없어요.") 사태를 악화시킨다.

하지만 우리 눈에 그녀의 단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씩씩하고 용감해 보일 뿐. 나홍진의 연출 탓이다. 성애의 등장 씬은 강렬하다. 여전사의 재림. 이 연출은 성애가 멋지고 정의롭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왜 이렇게 연출했을까? 나홍진은 관객을 속일 때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여성 히어로를 연상케 하는 이 연출은 우리가 그녀 말을 의심 없이 믿게 만드는 트릭이다. 성애의 활약으로 외계인에 관한 환상, 선입견, 거짓말은 기정사실로 자리 잡는다.

  1. 역작의 이유

정리해 보자. 호포항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 비극을 책임질 범인이 필요하다. 이곳 주민이 아니라 외지인이어야 한다. 이때 끔찍한 괴물 등장. 사람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나홍진은 이 환상이 작동하는 순간에 장르를 뒤튼다. 의심이 생길 법한 순간(진짜 외계인 짓인가?) 장르적 쾌감으로 우릴 마취시키고 롤러코스터 위에 앉힌다. 그 쾌감을 거부할 수 있을까? 환상을 걷고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있을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다.

주제를 장르로 변환하는 아이디어. 그걸 숨기는 매끄러운 연출. 절묘하게 펼치는 장르적 쾌감. <호프>가 역작인 이유다.

  1. <호프> 외계인과 <곡성>의 악마는 닮았다

그렇다면 바미기르를 둘러싼 진실은 무엇일까?

일단 낯선 이방인이 있었다. 이건 주민들 말로 유추 가능하다. 키가 크고, 팔이 길고, 인간도 짐승도 아니다. 이건 이방인의 알레고리다. 하지만 스크린의 비친 이미지는 진실과 다를 것이다. 괴물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마구 살육하는 건 범석의 공포와 기대가 덧붙여진 결과니까.

<곡성>도 정확히 같은 구조다. 마을에 비극이 발생하는데, 마침 외지인이 온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소문을 공유하며 그가 범인이라고 믿는다. 누군가는 그가 악마로 변한 모습을 본다. 하지만 이건 환상일 뿐. 진실은 알 수 없다.

<곡성>의 악마와 <호프>의 외계인은 상응한다. <곡성>이 악마의 존재를 '미스터리'로 풀어냈다면 <호프>는 외계인의 존재를 'SF 장르의 쾌감'으로 소용한다. 하지만 그들이 낯선 타자에게 투영한 환상의 결과라는 점은 동일하다.

이 관점을 더 밀고 갈 때 해술 아저씨도, 목수도, 에필로그도 다른 말을 한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영화 #한국영화 #호프 #나홍진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

  • 사진은 <호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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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ik Kim 황정민은 ‘이 총 다 어디서 났어?’를 계속 묻고, 칼빈 소총 이후부터 사람들은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를 계속 말하잖아요. 딱봐도 늙은 할아버지 할마니.. 나중엔 정호연 순경까지.. 정육점 주인 경석을 오인 사격하고,, 나중엔 친구 동생이 붙잡혀있는데도 고민하다 그냥 쏘고.. 문석(?)은 그냥 아예 외계인 애기(..)를 보자마자 쏴서 냉동창고에 가두고.. 이게 아무리 북한 근처고.. 전반적으로 지능이 떨어진 지역 마을 수준을 감안해서라도 그런거 치곤 화기가 너무 많고.. 화기를 다루는데 황정민 빼곤 다 능숙하고 서슴없죠..

그래서 2편에서는 아마도 진격의 거인처럼.. 이젠 북한의 존재가 미비해졌으니 외계세력을 적화 하는 결말로 갈듯도 하고..(하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만) 아무튼 그 마을의 ‘기묘한 상태’를 계속 보여줄거같아요. 어쩌다 호포항은 이렇게 됐나..
3d ago
Junghyun Lee 저도 관점이 바뀐다는 면에서 히로카즈의 <괴물>을 연상했습니다. 2d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