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 화. 세이렌. 듣고 싶은 노래.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았던 노래. 세이렌은 흔히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죽음으로 이끄는 존재로 알...
Canonical: https://social-archive.org/hyungyunlim/LpJU125xZH
Original URL: https://www.facebook.com/sim.youngseop.9/posts/pfbid0WaXkRikWbZsGyDroAhLjQSq92G4fGVxQGc2JE5dwL3hHCdUnL27FRfrKyfgrrCAXl
Author: Sim Youngseop
Platform: facebook
Share mode: full
## Content
제 10 화. 세이렌. 듣고 싶은 노래.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았던 노래. 세이렌은 흔히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죽음으로 이끄는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의 로렐라이 전설도 이와 닮았습니다. 라인 강변의 높은 바위 위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이 노래로 뱃사람들의 넋을 빼앗고, 결국 배를 암초에 부딪혀 난파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아름다운 소리’ 속에 죽음이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세이렌과 싸우지 않습니다. 키클롭스처럼 눈을 찌르지도 않고, 라이스트뤼고네스에게서처럼 달아나지도 않으며, 키르케에게 했던 것처럼 협상을 벌이지도 않습니다. 이번의 적은 눈앞에 있지만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리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이렌은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갈망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12권에서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부하들의 귀에는 밀랍을 넣고, 자신은 돛대에 묶인 채 노래를 들으라는 것이지요.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사람은 다시는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며, 그들이 머무는 곳 주변에는 죽은 자들의 뼈가 수북이 쌓여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만 예외를 허락합니다. “네가 원한다면 들어도 좋다. 다만 몸을 돛대에 단단히 묶어라.” 이 장면은 흔히 생각하듯 단순한 ‘절제의 승리’가 아닙니다. 오디세우스는 유혹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유혹을 경험하되 그 대가만은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부하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습니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만은 듣습니다. 그는 안전장치를 마련한 뒤 금지된 쾌락과 지식을 경험합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불편한 권력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위험은 모두에게 동일하지만, 경험할 권리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부하들은 귀를 막은 채 노를 젓습니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그들의 육체입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노동하지 않은 채 돛대에 묶여 노래를 듣습니다. 호메로스의 원전에서도 이 차이는 분명합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키르케의 예언을 전하며 자신만은 그 노래를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하들은 귀가 막힌 채 계속 노를 젓고, 오디세우스는 돛대에 묶여 혼자 세이렌의 목소리를 경험합니다. 바로 이 장면 때문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근대적 인간의 원형으로 읽었습니다. 그들은 오디세우스를 최초의 부르주아적 인간이자 자기 보존을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이 광경은 거의 계급사회에 대한 우화처럼 보입니다. 노동자들은 감각을 차단한 채 노를 젓고, 주인은 노동하지 않은 채 예술과 쾌락을 향유합니다. 그러나 주인 역시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그는 돛대에 묶여 있으니까요. 이 점을 조금 더 들여다봅시다. 부하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고, 오디세우스는 듣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쪽은 감각을 박탈당하고, 다른 한쪽은 욕망을 억압당합니다. 근대적인 인간의 이상한 운명은 어쩌면 여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욕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대신 욕망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묶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 금지와 규칙을 부과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이지요. 놀란의 영화는 이 오래된 장면의 불편함을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끌어냅니다. 원전에서는 부하들이 끝까지 밀랍을 빼지 않기 때문에 세이렌의 장면에서 죽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한 병사가 결국 귀에서 밀랍을 빼 버립니다. 그는 노래를 듣고, 바다로 뛰어들어 세이렌을 향해 헤엄쳐 갑니다.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원전에서 세이렌의 위험은 오디세우스의 몸부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한 인간이 실제로 그 유혹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관객은 그 순간 알게 됩니다. 오디세우스가 듣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그렇다면 세이렌은 대체 무엇을 노래할까요? 이 지점에서 원전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는 세이렌의 노래를 흔히 성적인 유혹으로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 육체의 쾌락, 금지된 욕망의 부름. 세이렌 역시 아름다운 금발의 인어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쉽게 상상합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세이렌은 오디세우스에게 육체적 쾌락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먼저 오디세우스를 알아봅니다. “명성 높은 오디세우스, 아카이아인의 위대한 영광이여.” 그리고 자신들은 트로이에서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이 겪은 모든 일을 알고 있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노래를 들으면 즐거움을 얻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현명해질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세이렌이 오디세우스에게 제시하는 것은 여자가 아닙니다. 지식입니다. 그리고 지식보다 더 위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이렌은 오디세우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트로이의 영웅. 그리스 최고의 지략가.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남자. 세이렌의 노래는 그의 가장 깊은 나르시시즘을 건드립니다. 그래서 세이렌은 미래를 약속하는 존재라기보다, 어쩌면 ‘완전한 과거’를 약속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전쟁, 죽은 동료들, 트로이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 정리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해 가장 간절히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내가 겪은 일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 고통에는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내가 살아남은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세이렌은 그 답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답을 끝까지 들으면 죽습니다. 여기에 세이렌 신화의 기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삶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삶은 어쩌면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계속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내가 겪은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도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삶에는 언제나 해석되지 않은 한 조각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이렌은 그 불확실성을 없애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이리 오라. 네가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알려 주겠다. 그 유혹은 육체의 쾌락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영화는 바로 이 부분을 더욱 깊숙이 파고듭니다. 온몸으로 몸부림치며 울부짖으며 절규하며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에우릴로코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세이렌은 자신이 가장 갈망하던 것을 들려준 뒤, 그것을 들은 사실을 후회하게 만든다고. 미치도록 원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감각을 남긴다고. 원전의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을 지나간 뒤 그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바로 그 빈칸을 채웁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단순한 ‘유혹’이 아니라 ‘상실을 만들어 내는 경험’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미치도록 간지럽고 괴롭고 긁고 싶지만 긁을 수 없는 어떤 상실감. 세이렌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들려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자기 안에 있었으나 너무 깊이 묻혀 있어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욕망을, 너무나 완전한 형태로 잠깐 보여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보다, 잠깐이나마 가졌다고 믿었던 것을 빼앗겼을 때 훨씬 큰 상실을 느낍니다. 세이렌의 노래는 바로 그 마음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세이렌은 오디세우스가 스스로에게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듣고 싶지 않았던 욕망을 정확히 찌릅니다. “너는 귀향을 원하지 않는다.” 겉으로 오디세우스는 언제나 이타카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페넬로페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들과 왕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어쩌면 이 여정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귀향한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다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한 왕국의 왕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계의 끝에서 괴물과 신들을 상대하던 영웅이 다시 일상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이렌은 오디세우스가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동시에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전해 줍니다. 그래서 세이렌의 말은 유혹이라기보다 ‘폭로’에 가깝습니다. 한 번 떠난 인간은 떠나기 전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이것이 세이렌의 노래가 오디세우스의 마음에 남기는 ‘큰 흉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장면에서 관객의 귀가 영화 속 인물의 귀와 거의 같은 위치에 놓인다는 점입니다. 부하들이 귀에 밀랍을 넣는 순간 영화는 소리를 차단하거나 극단적으로 억누르면서 우리가 그들의 청각 상태를 체험하도록 만듭니다.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고,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찾아옵니다. 놀란은 음향을 통해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를 분리합니다. 소리가 끊기는 순간 우리는 오디세우스의 부하가 됩니다. 그리고 소리가 다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됩니다. 관객은 안전한 극장 의자에 앉아 오디세우스와 똑같은 욕망을 품습니다. 죽을 위험은 없지만 세이렌의 노래는 듣고 싶다. 생각해 보면 영화관이라는 장소 자체가 오디세우스의 돛대와 배와 닮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두운 공간의 의자에 몸을 맡기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것들을 바라봅니다. 살인도 보고, 전쟁도 보고, 죽음도 보고, 욕망도 봅니다. 실제 위험은 경험하지 않으면서 공포와 죽음과 욕망을 소비합니다. 오디세우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심보입니다. 그래서 놀란의 세이렌 장면은 영화 자체에 대한 자기반영적인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영화란 결국 우리를 돛대에 묶어 놓고 세이렌의 노래를 들려주는 장치가 아닐까요. 루드비히 고란손의 OST에서도 이 대목은 아예 〈Sirens〉라는 독립된 곡으로 배치되어 있고, 보컬의 사용이 두드러집니다. 결국 세이렌은 ‘보는 괴물’이라기보다 ‘듣는 괴물’이어야 합니다. 키클롭스에게서는 눈이 중요했습니다. 세이렌에게서는 귀가 중요합니다. 키클롭스에게서는 괴물의 감각기관을 파괴해야 살아남습니다. 세이렌에게서는 자신의 감각기관을 닫아야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끝내 자신의 귀를 닫지 않습니다. 귀를 닫는 대신 차라리 자기 자신을 무력화합니다. 이 얼마나 현대적인 자기통제의 방식입니까.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집에서 술을 치워 놓는 것. 도박을 하지 않기 위해 계좌를 막아 놓는 것. 충동적으로 연락하지 않기 위해 상대의 번호를 지워 버리는 것. 자신의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젠가 의지가 무너질 것이라고 미리 가정하고 환경을 통제하는 방식말입니다. “나는 참을 수 있다.” 가 아니라, “나는 결국 참지 못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근대적 인간의 원형으로 독파한지도 모르죠.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그가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자기 귀에도 밀랍을 넣으면 됩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어쩌면 오디세우스라는 인간의 본질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남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어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위험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그 위험을 경험한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오디세우스의 위대함과 위험함은 같은 곳에서 나옵니다. 호기심.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살아남음에도 대가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몸은 살아 돌아옵니다. 그러나 귀에 들어온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 번 들어 버린 노래는 다시 들리지 않게 할 수는 있어도, 듣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드라마 안 본 눈 산다’와 같은 논리이지요) 그렇다면 세이렌의 진짜 무기는 노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게 하는 것. 기억과 반추. 욕망과 억압 키클롭스는 사람의 몸을 먹습니다. 라이스트뤼고네스는 배와 군대를 파괴합니다. 키르케는 인간을 짐승으로 만듭니다. 저승의 유령들은 살아남은 자에게 죽은 자의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나 세이렌은 훨씬 조용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빼앗지 않습니다. 그저 노래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도록 만듭니다. 어쩌면 《오디세이》에서 가장 위험한 괴물은 세이렌 아닐까요? 진정한 괴물은 우리를 억지로 죽음으로 끌고 가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을 들려준 후 가장 듣고 싶지 않는 것도 들려 주어 우리 스스로 죽음 쪽으로 걸어가게 만드는 존재. 세상에서 가장 가장 무서운 노래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마음속에 있었지만, 우리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바로 그 말’일 것입니다. - 계속
## Media
1. image: https://social-archiver-api.social-archive.org/media/archives/hyungyunlim/GXNxCiiXgO/media/0.jpg
